빛으로 쌓아올린 거룩한 건축
서소문 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에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로,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도시 한복판의 골고다(Golgotha -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루살렘 성 밖 언덕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로 불린다. 잔혹한 역사의 흔적 위에 세워진 이곳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믿음과 양심,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한 사람들의 잊혀져가는 기억을 품은 채 한때 공영주차장과 쓰레기 적환장으로 전락했었다. 프로젝트는 기존 주차장의 구조 모듈을 재해석해 공간을 구성하고, 약 백만 장의 붉은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해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삶을 담는 도시의 언어
다시 찾은 밀라노는 역시 여유로움의 도시였다. 중심지의 오랜 건축물과 잘 조성된 녹지, 돌로 깔린 도로 바닥과 100년 넘은 트램은 도시에 체적으로 느리게 변하는 시간의 층을 만들어내고, 복잡하고 어수선한 것들을 마치 물레질하듯 가다듬고 있었다. 흐린 날에는 흐린 대로 윤곽을 감추고, 맑은 날은 맑은 대로 선명하게 드러내며, 날씨와 무관하게 불편하지 않은 감성을 주었다.
밀라노는 오랫동안 패션과 금융의 중심지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이 도시를 직접 걸어보니, 진정한 매력은 거리 곳곳에서 펼쳐지는 건축적 실험에 있었다. 특히 쇼핑 디스트릭트 인근의 포르타 누오바(Porta Nuova) 지구는 현대 도시가 어떻게 모던함과 자연, 그리고 삶의 여유를 하나로 엮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살아있는 교과서와도 같았다.
빛과 구조, 그리고 기억의 층
비가 오고 있었다. 패션과 건축의 도시, 밀라노를 걷기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 날씨라고 생각했다. 기대했던 풍경이 흐릿하게 번져 아쉬웠고, 하늘을 원망했다. 하지만 도시는, 우산을 거의 쓰지 않고 걷는 사람들처럼 당당했다. 비가 개길 바란 건 나뿐인 것 같았다. 그리고, Fondazione Prada에 도착했을 때, 비는 오히려 이 아름다운 도시의 질감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젖은 금빛 벽, 콘크리트의 회색, 유리창에 맺힌 물방울까지 — 모든 것이 하나의 장면처럼 어우러졌다.
Fondazione Prada에 방문했을 때, 알던 브랜드 프라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공간의 이름에 다섯 글자 P.R.A.D.A 뿐, 이 공간은 오롯한 철학과 예술, 영화, 디자인이 함께 호흡하는 복합문화 플랫폼이었다.
전통과 현대의 접점
언젠가 라디오에서 처음 이 노래를 들었을 때, 잠시 말을 잃은 적이 있다. "범 내려온다"라는 두 단어가 일정한 패턴 속에 반복되는 가사가 중독성 강한 리듬 위에 지그재그로 겹겹이 쌓여 이룬 조화가 놀라웠다. 기타와 키보드, 드럼이 만든 리듬과 구성진 판소리 보컬의 오묘한 조화가 양산된 사운드에 지친 현대인의 귀를 편하게 하니 모를 일이었다.
오랜 창(倡)에 현대적 리듬을 더한 밴드 이날치의 음악은 낯선 전통이 달리 다가온 경험이었다. 그동안 서예, 청자, 금(琴) 등 많은 전통 예술이 현대식으로 재해석되어 왔지만, 대체로 소재만 변주한 경우가 많았다. 이날치의 음악은 전통의 뼈대를 그대로 두면서도 전혀 다른 감도를 만들어낸 사례였다. 전통이 가진 깊이에는 이미 세련됨도 담겨있다는 것을 증명한 시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