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으로 쌓아올린 거룩한 건축
서소문 성지역사문화박물관
단풍 잎의 붉은 빛과 은행 잎의 노란 빛은 한데 섞여도 어색함이 없다. 옷을 위아래로 그렇게 입는다면 조화롭기 어려울 텐데, 색도 잎도 제각각인 피조물들이 뒤섞여 서로 어울리는 건 아마도 그 색의 재료 때문이 아닐까. 오랜 시간 빛이 물들인 가을 잎처럼, 세월의 층위를 재현한 건물 또한 오직 빛으로 그 존재를 드러낸다.
감춤으로 드러내는 의미
가을의 어느 주말, 서소문 성지역사문화박물관을 찾았다. 윤승현(중앙대), 이규상(보이드아키텍트), 우준승(레스건축) 세 건축가가 2014년 설계공모를 통해 공동 설계한 이 작품은 조선 후기 천주교 순교지였던 땅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건물을 지상에 드러내지 않고 땅속에 잠기게 한 형태가 특징이다. 감춤으로 드러낸 의미는 마치 물속에서 호흡하는 흰수염 고래처럼 세속에선 쉽게 발견하기 힘들다. 방문자는 순례하듯 아래로 하향해 들어가야만 역사 속 진실과 마주할 수 있다.
서소문 성지는 조선 후기 천주교 박해 시대에 수많은 신자들이 순교한 장소로, 한국 가톨릭 역사에서 가장 상징적인 '도시 한복판의 골고다(Golgotha - 성경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루살렘 성 밖 언덕을 가리키는 히브리어에서 유래)'로 불린다. 잔혹한 역사의 흔적 위에 세워진 이곳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믿음과 양심, 인간의 존엄을 지키려 한 사람들의 잊혀져가는 기억을 품은 채 한때 공영주차장과 쓰레기 적환장으로 전락했었다. 프로젝트는 기존 주차장의 구조 모듈을 재해석해 공간을 구성하고, 약 백만 장의 붉은 벽돌과 노출 콘크리트를 사용해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이중 구조가 만드는 침잠의 여정
서소문 성지역사문화박물관은 지상의 공원과 지하의 박물관이라는 이중 구조를 통해 스스로를 감추며 의미를 드러낸다. 빛과 여백이 공간의 중심을 잡고, 하향·체류·상향으로 이어지는 동선은 이곳의 역사성과 침잠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이끈다.
공원과 맞닿은 입구를 지나면 동선은 자연스럽게 아래로 이어진다. 길게 펼쳐진 경사로와 낮아지는 조도, 무겁게 내려앉은 천장이 속도를 늦추고 마음을 가라앉힌다. 밝은 지상에서 멀어질수록 소음은 잦아들고 발걸음은 느려진다. 이 짧은 하향의 시간이 박물관의 첫 문장이며, 보이지 않던 내부가 차츰 모습을 드러내며 방문자는 '기억의 깊이'로 들어간다.
벽돌이 만드는 시간의 결
안쪽으로 들어서면 붉은 벽돌이 공간 전체의 결을 만든다. 건식의 표면, 일정한 반복, 장식 없는 단면. 따뜻함보다는 묵직함에 가까운 붉은 톤이 시간이 쌓인 듯한 분위기를 만든다. 벽돌은 이곳이 다루는 역사의 성질을 그대로 담았다. 이야기보다 조용한 감각으로, 과장된 재현 대신 쌓이는 표면으로 기억을 표현했다.
지하의 중정은 건물 속에 숨은 또 하나의 하늘이다. 사각형의 틈으로 떨어지는 빛이 벽을 따라 흘러내린다. 건축이 만든 틀 안에서 하늘은 더 선명하게 느껴진다.
작품과 공간은 서로를 방해하지 않고 한 호흡으로 이어진다. 어두운 조형물이 벽돌 앞에 놓이면 벽의 질감이 작품을 밀어올리고, 작품의 표면은 공간의 조용함을 더 깊게 만든다. 각 조형물에는 그만의 의미가 담겨 있다. 발걸음, 침묵, 기다림, 고뇌, 좌절, 환희, 고통을 바라보자면 모두를 품은 듯하다.
일상으로 가져올 수 있는 공간의 질감
이 건축물이 차용한 빛과 적막, 질감과 여백의 원리는 일상의 주거공간에도 적용해볼 수 있다.
한 면을 러프한 벽돌이나 시멘트 질감으로 정리하는 것만으로도 공간의 톤이 잡힌다. 조명은 직광보다는 벽과 천장을 비추는 간접조명을 늘리면 공간의 기운이 자연스럽게 차분해진다. 소재는 목재·시멘트·패브릭 같은 조용한 질감으로 한정하는 편이 좋다. 많은 소품보다 하나의 존재감 있는 오브제가 여백을 더 단단하게 세운다.
하루의 번잡함을 벗어나 차분하고 싶다면 침실이나 서재에 낮은 조도를 적용하고, 상부에 사각형 코브조명을 두어 빛이 '하늘창처럼' 느껴지게 해보자. 커튼이나 패브릭 패널로 잔향을 줄이면 공간 전체가 차분해진다.
결국 좋은 공간은 화려함보다,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비울지에 대한 용기에서 시작된다.